이금순 소리꾼 (판소리, 민요)
• 제 22회 전국시조 가사 가곡 경창대회 2등상 수상
• 제 24회 전국 시조 가사 가곡 경창대회 명창부
• 제 8회 전국시조 가사 가곡 경창대회 2등상 수상
• 제 28회 전국 시조 가사 가곡 경창대회 을부 3등상 수상
• 제 19회 전국 남녀 시조 가사 가곡 경창대회 명창부 2등상
• 제 18회 시조 경창대회 명인부 1등상
• 제 47회 전국 시조 가사 가곡 경창대회 특부 2등상
• 영호남 시조 경창대회 2등상
*순천문화재단 박희연 기자는, 예술을 사랑하고 지역예술가의 행보를 응원하기 위해 월 1회 ‘지역예술가 릴레이 인터뷰’를 기획 진행하고자 합니다. 지역에서 문화예술이 풍성하게 꽃피우려면 지역 예술인에 대해 모두의 관심과 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순서로 노익장 속에서 맛깔난 우리소리를 구사하며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이금순 님을 인터뷰합니다.
Q1. 노래를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A1. 노래를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때 합창반에 뽑혀서 시작했지. ‘가을이라 가을바람’ 동요로 뽑혔어. 근데 6.25로 1학년 1학기밖에 못 다녔어. 그래도 전쟁 끝나고 교회에서 합창단에 참여함으로써 노래를 계속 해나갈 수는 있었지.
Q2. 교회를 통해 노래를 계속 해갈 수 있으셨군요.
A2. 어머니가 막둥이 키우느라 바쁘셨고 중풍에 걸리셨어. 그 와중에 교회를 동네사람들과 얼싸덜싸 댕겼지. 가면 지금같이 뭘 주고 그랬어 ‘뒷동산 위에 핀 어린백합화 아름다워라 너를 떠나 멀리가는 마음 구슬퍼라’ 이런 노래를 즐겨 불렀어. 나는 알토였는데 소프라노도 있었지. 그 외에도 ‘여자의 일생’ ‘황포돛대’ 이런 노래들도 좋아했지.
Q3. 집안의 반대는 없으셨어요?
A3. 열 몇 살 먹었을 때, 콩쿨을 못 나갔어. 동네에 내논 여자는 못 써먹는다고 해서 저녁에 노래연습을 했는데, 사당질 나갈라냐고 어머니가 못하게 했어. 양반집 큰애기라고. 결국 일찍 시집을 가서 애들 낳고, 그와중에 남편 사업 실패로 전전긍긍 살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
Q4. 그래도 지금까지 노래를 해오신 것을 보면 그 끈을 놓지 않으시고 계속 해오셨다는 건데, 좀더 자세히 내용을 얘기해 주세요.
A4. 여성국극단엘 가고 싶었어. 따라가고 싶어 죽겄드라고. 남장여자도 있고 도령역할도 있고 춘향이도 하고싶고. 남편의 모자공장은 실패를 했고, 식당을 하며 못이룬 노래에 대한 꿈이 컸지. 나이롱 극장, 가설극장 무대에 약장사가 오르곤 했는데 그거 보려고 식당 문을 닫고 거기를 갔어. 떡, 홍시, 감 사들고 갔지. 춘향이 슬픈 소리, 저 소리를 내가 하고 싶다는 꿈으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판소리를 다 듣고 갔었어. 야외전축 틀어 놓고 모자공장엘 일하면서 새타령 민요를 배웠지.
Q5. 선생님을 밀어주거나 서포트해 주시려는 분은 없으셨나요?
A5. 음악회 모임이 있었어. 내가 노래를 잘하니까, 마스터가 나를 키우려고 했지. C minor, D minor 써서 책을 줘가면서 노래를 시키더라고. 성이 강 씨였는데, 결국 간암으로 죽어버려서 나를 끝까지 밀어주지 못했어. 긴있고, 하는 것이 이쁘고 잘한다고 늘 했었는데 내가 운대가리가 없었던 거지. 아코디언, 기타 주자도 있었는데 아코디언 했던 양반은 종양으로 죽었어. 나중에 화류춘몽으로 송해를 찾아뵈려고도 했었는데 아무튼 나는 인연이 좋지는 않은가 봐.
Q6. 식당하면서 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셨다면서요.
A6. 식당하면서 국악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어. 사람 맡겨 놓고. 아침 9-10시 한 시간 딱 하고 왔어. 노래를 한 달에 몇 개씩을 배웠는데, 이건 자랑이 아니야. 들으면 안 잊혀져서 그게 내 천업이었나봐. 한혜순 씨 광주 문화재 2호에게도 배우고, 안채봉 씨 국악인 대가한테도 배웠어. 무용도 했고 사물놀이도 했고 판소리도 했고. ‘반거충이’(*무엇을 배우다가 중도에 그만두어 다 이루지 못한 사람)는 되었지. 하다 말고, 대가는 못 되었지.
무용으로는 이상수 씨가 유명했는데 전남무용협회인가 회장도 하셨어. 13명 짜여서 부채춤 장구춤, 안한 것이 없네. 연극도 했는데 도청 앞 광주시민회관 공연도 크게 하고 그랬어. 그때 그 13명 중에 현재 살아있는 사람은 얼마 없어. 일본인들과도 함께 공연하기도 했는데 국제 공연이었지. 일본인은 부채춤 추고 우리는 기생옷 입고 추고 그랬어.
Q7. 모자공장 이야기도 더 해주세요.
A7. 모자공장은 광주에 있었어. 육영수 여사 있을 적 얘긴데, 예비군모표 전라남도 것을 다하라고 했어. 애기아빠가 기술이 좋았거든. 빚 얻어서 기계사고 싹 만들었는데 다른 데서 특허난 것을 모르고 해버린 거야. 암행어사에 걸려버려서 싹 압수당하고 거지 되었지. 애기가 다섯이었고, 밀가루 죽 겨우 먹이며 굶겨 죽이게 생기니 식당을 시작했어. 다행인 건 원래 압수당하고 징역도 살아야 했는데, 징역은 면제되고 압수만 당한 거야. 새마을 공로로. 애기아빠는 실패 후 타락이 되어버렸어.
Q8. 다섯 자녀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세요.
A8. 애기아빠는 삼대독자였는데, 21살에 큰아들 낳고 23살에 둘째아들, 25살에 큰딸이 태어났어. 애밴 상태에서 총 맞아서 한 아이는 날렸지. 그때 큰 아들은 8살이었는데, 쥐잡는 공기총 꽁탄을 맞아 순식간에 방아쇠가 당겨져 배를 맞아버린 거야. 그때 애기는 8개월째였고.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실탄이 애기 입 옆에 있는 상황이라더라고. 바로 10시 20분에 수술 시작해서 4시간 20분을 실탄 찾는 수술을 했는데 실탄은 못 찾고 애기는 가 버렸어. 그후로 애기를 둘 낳아서 도합 삼남 이녀를 낳았어. 둘째아들은 신장염을 치료를 못하고 죽어버렸고. 하루 600원이 되는 약을 6개월 먹으면 낫는다 했는데, 못 낫고 죽어버렸지. 눈을 뒤집어까더니 아버지를 두 번 부르고 죽었어. 내가 미쳐서 산으로 들로 다녔었지.
Q9. 모자 가게를 접고 식당을 차린 이야기도 해주세요.
A9. 주위에서 모자 가게에다가 식당을 차려보라고 권유를 했어. 당시 식당은 쌍놈이 하는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고 우리집이 전주이씨 양반집안이라 시작은 쉽지 않았어. 그래도 은하 엄마, 장사를 시작해 봐 그 말에 모자를 치우고 식당 겸 술도 팔고 했지. 손님은 많았어. 하지만 애기 아버지가 개판이었지. 손님들이 술을 권유를 하는데, 술 못 먹는다고 하면 그게 질투가 나서 나와서 다이랑 식당 살림을 깨부수곤 했어. 자기는 벌어주지도 않으면서 말야. 나를 또 때려. 도망 다니는 게 일이었어. 하도 화나서, 바가지로 물을 한 바가지 하면서 ‘돈도 못 벌면서’라고 했더니 칼로 찍어 죽여버리려고도 하더라고. 딸이 잡고 말렸어. 손목을 잡고 늘어지는데 손이 안 펴져. 칼을 꽉 쥔 손이 안 빼지는 거야. 남편이 ‘시발년, 디져라 디져’라고 했어.
Q10. 식당일이 많이 고되셨지요.
A10. 장사해서 일수를 찍어야 했어. 안주 사고 술 사려면 항상 모자랐어. 옆집은 장사가 더 안 됐는데 우리집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지. 남편의 술주정과 폭력이 가장 힘들었지. 이제껏 애들 고아 만들기 싫어서 못 나갔는데, 남편 몰래 집을 얻어 딴 데로 이사를 갔어. 동네 사람들이 전부 집을 남편에게 안 알려주며 나를 도왔어. 송정리에 식모살러 갔다고 감춰 주었어. 그후 식당을 크게 하면서 숨을 좀 쉬었지. 광주 대인시장 구역전 터미널 네거리에서 장사를 크게 시작했는데 추어탕 곰탕 전문집이었어. 그러다 터미널이 광천동 가버린 후엔 금남로로 가서 장사를 했지. 양푼 하나에 가득 담아주니 손님들에게 소문이 나서 장사를 잘 했지. 금남로 5가에서 짱뚱이 장사를 하기도 하고 남광주시장 쪽 이사 가서 돼지족발 장사도 잘 되었어. 광주천 하천가 학강다리 쪽이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윷놀이 하며 노는 그곳에서 비빔국수를 70그릇씩 팔았어. 오이채 썰어서 열무김치 참기름 버무려 드렸는데 소문이 나서 손님들이 잘 먹었어. 사실 처음부터 크게 식당했던 건 아니었고, 포장마차부터 어렵게 해갔던 거야. 구루마 실어다 준다고 큰 아들 둘째 아들이 포장마차를 같이 다녀주었던 순간을 잊지 못해. 단속해서 뺐기면 포장마차를 다시 만들어야 했기에 조마조마한 시절이었지. 몇 년을 그렇게 살았었는데, 식당을 크게 한 건 출세한 거지. 여관도 사서 시작했는데 그건 5.18 뒤이고.
Q11. 5.18때 이야기도 해주세요.
A11. 큰아들이 5.18 때 다쳤어. 당시 시청 앞에 살았는데, 어머니가 못 나가게 하는데도 기어이 추리닝을 입고 나가더니 나가자마자 포를 맞아버렸어. 5.21일날이었지. 스물아홉에 쌍둥이 아버지였던 아들은 그렇게 (저승으로) 가버렸고 며느리도 어디로 가버렸네. 9살이던 애기는 24살이 되었는데 아직까지 애기를 안 보여줘. 국가유공자는 아내가 되었고, 아들은 5.18 신묘역에 안장되었지. 후에 5.18 연극했던 때를 잊지 못해. 구음으로 씻김굿 공연을 18번을 했는데 관객도 울면서 그 공연을 봤어.
Q12. 광주에 계시다가 순천엔 어떻게 오시게 된 거에요?
A12. 광주에서 크게 식당도 하고 공연도 하며 살다가 55세에 순천을 왔어. 애기아빠 돌아가시고 지금 30년째 살고 있지. 순천와서 연예협회를 20년을 다니고, 봉사활동도 20년을 했어. 각설이로 대상 받은 정도 있었고 양반춤도 췄는데 지금은 다 잊어버렸네.
Q13. 이제까지의 음악인생, 삶의 여정 속에서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요?
A13. 일단 내가 소리가 구식소리여. 지역에서 판소리로 유명한 김양남 님과 함께 배우기도 했는데 클 수 있는 기회도 놓쳐버렸고, 이제는 소리를 더 하고 싶어도 몸이 아파서 못 해. (양)승화만큼만 내가 배웠어도 날아다녔겠다는 생각도 해. 이렇게 살다 늙는 게 한이고 허송세월에 한이 맺혀. 아들 둘을 먼저 보내고 못 따라가고 사는데 (애기 아빠한테 질려서) 남자도 싫어하고, 스트레스에 매일 아프지. 그래도 양승화 소리꾼이 나에게는 귀해. 늘 내 실력 정도면 잘하지 않냐고 어디든 데꼬 다니려 해줘서 고맙지.
Q14.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 주세요.
A14. 창은 힘들어. 돈도 많이 들고. 그에 비해 얼싸덜싸 민요도 청중은 좋아하지. 소원이 있다면 옛날 가요들로 채운 내 테이프를 만들고 싶어. ‘수덕사의 여승’ ‘여자의 일생’ 이런 노래들을 들었다 하면 다 해버렸는데 아쉬워. 젊은 친구들에게 꿈이 있다면 한 길로 가라고 말해주고 싶어. 구신민요, 옛노래, 시조창 등등 난 오만 것을 다 했는데 한 우물을 파는 사람은 못 이기는 것 같아. 요즘 젊은 사람들이 하는 창작국악이 좋아 보이더라고. 배띄워라 같은. 창부타령도 민요 지어내서 하고. 좋은 흐름인 것 같아.